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이 사회는 너희처럼 큰소리치는 놈들이 망쳐 놓은 거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고, 돈 없는게 죄다! 나는 돈 없고 빽 없는 놈이라 이렇게 된 거다!

도둑놈?범죄자는 바로 너희 같은 놈들인데.... 바로 너부터 죽여버리겠다!” 
사정없이 퍼붓는 폭언과 총부리를 거머쥔 지강헌의 눈빛은 살기로 싸늘하게 빛났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북가좌동 골목의 현장에는 최재진과 인파, 경찰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탈주범들의 어머니, 애인, 가족 등이 밖에서 자수를 애타게 호소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집 안쪽에서는 지강헌이 가장 좋아했다고 하는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핏 창문을 통해 탈주범들과 인질의 모습이 보였다. 지강헌과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 등 네 명의 탈주범들은 눈에 핏발이 선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권총과 칼로 인질인 고씨의 딸을 위협하며 경찰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인질로 잡힌 고씨의 딸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고 죽겠다! 영등포 교도소에서 죽지 못한 게 한이다 ‘有錢無罪, 無錢有罪’ 우리나라 법이 이렇다!” 
탈주범 가운데 주범격인 지강헌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내 할말 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 세상에 마지막으로 시를 한편 남기겠다. 내 유언을 한마디로 줄이면 나는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염세주의자이다!”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며 절규하는 그의 울부짖음 뒤로 <홀리데이>가 마치 장송곡처럼 흘러 나왔다.

 

 

지강헌 사건"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 한동안 이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돈이 없으면 죄가 되고, 돈만 있으면 죄도 가벼워지는 어두운 시대의 모순을 향해 던진 한 탈옥수의 울분이었다. 이른바 ‘지강헌 사건’. 1988년, 온 나라가 올림픽 성공의 흥에 취해 있을 무렵 주동자 지강헌을 포함한 12명의 죄수가 이송 중 탈옥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9일 동안 이들 일행은 수차례 인질을 바꿔가며 도주를 시도했지만,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했으며 가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국 지강헌을 포함하여 최후에 남은 4인은 경찰과 대치하며 마지막 인질극을 벌였고, 지강헌은 깨진 유리로 목을 그어 자해를 시도했고, 그때 투입된 특공대는 지강헌 외 1명을 사살했다.

지강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70억원을 횡령 탈세하고도 고작 7년형을 선고받은 것에 비해, 잡범인 자신은 556만원 절도에 7년 언도, 보호감호 10년까지 포함하여 총 17년을 선고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탈주를 시도했다고 한다. 
 


또한 지강헌이란 인물 자체가 주는 흥미로움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지강헌은 시인이 꿈이었고, 설득력 있는 말솜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동료 탈주범에게 자수를 권고한 것, 마지막 인질 고선숙씨가 오히려 지강헌을 보호하려 든 것, 경찰과 대치하던 지강헌이 팝그룹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요구하여 하루종일 들은 것 등이 세간의 화제가 됐었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의 밝은 면만 강조할 것을 강요했던 정부의 행태에 영향받아 그 진상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다. 탈주를 시도한 한 잡범의 입에서 사회의 환부를 건드리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이 주목할만 하다.

 

 

 

 

 

 

'대담한 처녀' 고선숙이 남긴 마지막 수기 


1988년 10월,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행사를 성공리에 마친 후 아직 그 감흥에서 헤어나지 못한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충남 공주 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죄수 12명이 호송 차량을 탈취해 도주한 것. 

이들은 8박 9일 동안 서울 시내 가정집 5군데를 돌아다니며 당시 '신문기사 1면'을 장식했다. 이 사건은 17년이나 지난 지금 '홀리데이' 영화를 통해 재구성됐다. 

영화 '홀리데이'에서 마지막까지 인질로 잡혀 있던 처녀역의 실제 주인공은 고선숙(당시 22세)씨다. 당시 탈주범 지강헌뿐만 아니라, '대담한 처녀' 고선숙씨에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22살 여성이 보여준 침착한 태도에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6시간 동안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벽에 탈출을 감행하였고 동생과 어머니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고선숙씨는 끝까지 남아있어야 했다. 그는 1988년 10월 15일을 '피의 휴일'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 충격과 혼란의 16시간, 그들은 인간적이었다 > 라는 제목의 글은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그 날의 기억'이다. 당시 여성지 < 마드모아젤 > 에 수록된 이 글은 총 5페이지에 걸쳐 수기 형식으로 쓰여 있다. 사건직후 병원치료 중이던 고씨를 기자가 만나서 인터뷰하고 수기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피로 범벅된 처절한 휴일' 

수기는 '부탁'의 내용으로 시작된다. 

"제발 나나 우리 가족이 말하는 대로만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당부다. 그는 "보도내용이 전체적으로 너무 과장돼 있고,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묘사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10월 16일 "낮 12시 20분경에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고, 나는 경찰관들에게 업히다시피 이끌려서 집을 나왔다"고 한다. 안정을 되찾고 '피로 뒤범벅된 처절한 휴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피의 휴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끈질긴 취재진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정중한 4인의 탈주범'에 대해 담담하게 회상하고 있다. "남자들은 정중한 태도로 존대말을 쓰고 있었다"고 하면서 "협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칼과 권총도 어디로 감췄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눈치였고 엄마의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자수시키려는 노력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 글을 썼던 당시에도 "엄마는 지금도 '내가 젊은 아이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수 시키지 못한 걸 후회하며 울먹이신다"고 쓰여 있다. 

영화와 흡사한 부분 상당히 많아…일부 각색된 내용도 

당시 고선숙씨가 쓴 글을 보면, 영화 '홀리데이'가 묘사하는 장면 중 상당 부분이 실제 사건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탈주범들은 "자신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 '나쁜 돈이 아니니 너희들 필요한 것 사서 써라'고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고씨는 탈주범들이 실제로도 매우 '인간적'이었다고 술회했다. "오죽하면 내가 '나를 인질로 삼아서 빠져나가'라고 요구했을까" 하면서, "내 동생들은 왜 그들을 '영일이 오빠', '의철이 오빠', '광술이 오빠' 혹은 '강헌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을까"라고 했다. 

또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나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도 '미안하다. 정말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할테니 조금만 참아라'는 이야기를 몇 번씩 되뇌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기에 의하면, "(지강헌은) 피 묻은 담배를 입에 문채 경찰로부터 카세트 테이프를 받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LP판을 통해 '홀리데이' 음악이 흘러나온다. 

또 탈주범 중 한 사람인 강영일(당시 21세)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담을 넘어 들어온 동생에게 "나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지만 너는 부모님께 잘해 드려라. 형이 원망스럽지? 난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한의철(당시 20세)은 그 날 찾아온 애인에게 "나는 자살할 것이니까 너는 다른 마음먹지 말고 잘 살아. 나를 빨리 잊어버려"라고 쫓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들이 생략되었다. 

이 날 인질극의 마지막 장면을 고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지강헌)가 방에 떨어진 깨진 유리 조각을 집었다. 목에 대고 유리를 긋자 선혈이 솟았다. 이때 경찰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총을 발사했다. 고개를 숙이던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총알이 그의 복부에 가서 박혔다"고.

 

 

Posted by Corea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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