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2.22 지강헌 인질 납치 사건
  2. 2013.02.22 [한겨레][토요판] 노환규의 골든타임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이 사회는 너희처럼 큰소리치는 놈들이 망쳐 놓은 거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고, 돈 없는게 죄다! 나는 돈 없고 빽 없는 놈이라 이렇게 된 거다!

도둑놈?범죄자는 바로 너희 같은 놈들인데.... 바로 너부터 죽여버리겠다!” 
사정없이 퍼붓는 폭언과 총부리를 거머쥔 지강헌의 눈빛은 살기로 싸늘하게 빛났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북가좌동 골목의 현장에는 최재진과 인파, 경찰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탈주범들의 어머니, 애인, 가족 등이 밖에서 자수를 애타게 호소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집 안쪽에서는 지강헌이 가장 좋아했다고 하는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핏 창문을 통해 탈주범들과 인질의 모습이 보였다. 지강헌과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 등 네 명의 탈주범들은 눈에 핏발이 선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권총과 칼로 인질인 고씨의 딸을 위협하며 경찰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인질로 잡힌 고씨의 딸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고 죽겠다! 영등포 교도소에서 죽지 못한 게 한이다 ‘有錢無罪, 無錢有罪’ 우리나라 법이 이렇다!” 
탈주범 가운데 주범격인 지강헌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내 할말 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 세상에 마지막으로 시를 한편 남기겠다. 내 유언을 한마디로 줄이면 나는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염세주의자이다!”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며 절규하는 그의 울부짖음 뒤로 <홀리데이>가 마치 장송곡처럼 흘러 나왔다.

 

 

지강헌 사건"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 한동안 이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돈이 없으면 죄가 되고, 돈만 있으면 죄도 가벼워지는 어두운 시대의 모순을 향해 던진 한 탈옥수의 울분이었다. 이른바 ‘지강헌 사건’. 1988년, 온 나라가 올림픽 성공의 흥에 취해 있을 무렵 주동자 지강헌을 포함한 12명의 죄수가 이송 중 탈옥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9일 동안 이들 일행은 수차례 인질을 바꿔가며 도주를 시도했지만,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했으며 가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국 지강헌을 포함하여 최후에 남은 4인은 경찰과 대치하며 마지막 인질극을 벌였고, 지강헌은 깨진 유리로 목을 그어 자해를 시도했고, 그때 투입된 특공대는 지강헌 외 1명을 사살했다.

지강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70억원을 횡령 탈세하고도 고작 7년형을 선고받은 것에 비해, 잡범인 자신은 556만원 절도에 7년 언도, 보호감호 10년까지 포함하여 총 17년을 선고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탈주를 시도했다고 한다. 
 


또한 지강헌이란 인물 자체가 주는 흥미로움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지강헌은 시인이 꿈이었고, 설득력 있는 말솜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동료 탈주범에게 자수를 권고한 것, 마지막 인질 고선숙씨가 오히려 지강헌을 보호하려 든 것, 경찰과 대치하던 지강헌이 팝그룹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요구하여 하루종일 들은 것 등이 세간의 화제가 됐었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의 밝은 면만 강조할 것을 강요했던 정부의 행태에 영향받아 그 진상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다. 탈주를 시도한 한 잡범의 입에서 사회의 환부를 건드리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이 주목할만 하다.

 

 

 

 

 

 

'대담한 처녀' 고선숙이 남긴 마지막 수기 


1988년 10월,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행사를 성공리에 마친 후 아직 그 감흥에서 헤어나지 못한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충남 공주 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죄수 12명이 호송 차량을 탈취해 도주한 것. 

이들은 8박 9일 동안 서울 시내 가정집 5군데를 돌아다니며 당시 '신문기사 1면'을 장식했다. 이 사건은 17년이나 지난 지금 '홀리데이' 영화를 통해 재구성됐다. 

영화 '홀리데이'에서 마지막까지 인질로 잡혀 있던 처녀역의 실제 주인공은 고선숙(당시 22세)씨다. 당시 탈주범 지강헌뿐만 아니라, '대담한 처녀' 고선숙씨에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22살 여성이 보여준 침착한 태도에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6시간 동안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벽에 탈출을 감행하였고 동생과 어머니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고선숙씨는 끝까지 남아있어야 했다. 그는 1988년 10월 15일을 '피의 휴일'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 충격과 혼란의 16시간, 그들은 인간적이었다 > 라는 제목의 글은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그 날의 기억'이다. 당시 여성지 < 마드모아젤 > 에 수록된 이 글은 총 5페이지에 걸쳐 수기 형식으로 쓰여 있다. 사건직후 병원치료 중이던 고씨를 기자가 만나서 인터뷰하고 수기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피로 범벅된 처절한 휴일' 

수기는 '부탁'의 내용으로 시작된다. 

"제발 나나 우리 가족이 말하는 대로만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당부다. 그는 "보도내용이 전체적으로 너무 과장돼 있고,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묘사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10월 16일 "낮 12시 20분경에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고, 나는 경찰관들에게 업히다시피 이끌려서 집을 나왔다"고 한다. 안정을 되찾고 '피로 뒤범벅된 처절한 휴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피의 휴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끈질긴 취재진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정중한 4인의 탈주범'에 대해 담담하게 회상하고 있다. "남자들은 정중한 태도로 존대말을 쓰고 있었다"고 하면서 "협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칼과 권총도 어디로 감췄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눈치였고 엄마의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자수시키려는 노력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 글을 썼던 당시에도 "엄마는 지금도 '내가 젊은 아이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수 시키지 못한 걸 후회하며 울먹이신다"고 쓰여 있다. 

영화와 흡사한 부분 상당히 많아…일부 각색된 내용도 

당시 고선숙씨가 쓴 글을 보면, 영화 '홀리데이'가 묘사하는 장면 중 상당 부분이 실제 사건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탈주범들은 "자신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 '나쁜 돈이 아니니 너희들 필요한 것 사서 써라'고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고씨는 탈주범들이 실제로도 매우 '인간적'이었다고 술회했다. "오죽하면 내가 '나를 인질로 삼아서 빠져나가'라고 요구했을까" 하면서, "내 동생들은 왜 그들을 '영일이 오빠', '의철이 오빠', '광술이 오빠' 혹은 '강헌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을까"라고 했다. 

또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나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도 '미안하다. 정말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할테니 조금만 참아라'는 이야기를 몇 번씩 되뇌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기에 의하면, "(지강헌은) 피 묻은 담배를 입에 문채 경찰로부터 카세트 테이프를 받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LP판을 통해 '홀리데이' 음악이 흘러나온다. 

또 탈주범 중 한 사람인 강영일(당시 21세)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담을 넘어 들어온 동생에게 "나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지만 너는 부모님께 잘해 드려라. 형이 원망스럽지? 난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한의철(당시 20세)은 그 날 찾아온 애인에게 "나는 자살할 것이니까 너는 다른 마음먹지 말고 잘 살아. 나를 빨리 잊어버려"라고 쫓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들이 생략되었다. 

이 날 인질극의 마지막 장면을 고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지강헌)가 방에 떨어진 깨진 유리 조각을 집었다. 목에 대고 유리를 긋자 선혈이 솟았다. 이때 경찰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총을 발사했다. 고개를 숙이던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총알이 그의 복부에 가서 박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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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토요판] 노환규의 골든타임


<2> 레지던트때 만난 두 환자


텔레비전에서는 며칠째 탈주범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1988년 10월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던 미결수 12명이 버스 안에서 교도관을 덮쳐 권총을 빼앗고, 버스를 몰고 서울로 돌아와 달아난 것이다. 그중 몇 명은 여러 집을 전전하다가 어느 가정집에 들어가 인질극을 벌이게 되었다.

흉부외과 전공의(레지던트) 첫해인 나는 어느 때보다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한달에 두어번이나 집에 들어갔을까. 10월16일, 그날 하루도 쏜살같이 지나갔다. 응급실로 내려오라는 연락만 없었더라면, 그저 바쁘지만 평범한 하루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일반외과와 흉부외과, 누가 해야 하느냐

응급실에서 나를 맞은 건 수십명의 기자들과 카메라였다. 카메라 조명으로 응급실은 방송국 세트장을 방불케 했다. 거기에 탈주범들의 대장 격인 지강헌(당시 34살)이 누워 있었다.

이날 세상 사람들의 이목은 응급실에 쏠려 있었다. '광란과 공포의 휴일 아침'이라고 묘사됐던 인질극이 막 끝난 뒤였다. 서울 북가좌동의 가정집에 침입해 인질극을 벌이다 경찰 총을 맞고 응급실에 실려 온 것이었다. 교도소 이송버스에서 빠져나온 탈주범 중 4명이 전날 밤 이 가정집에 침입했고, 이날 아침 경찰과 대치하던 중 둘은 자살했다. 지강헌은 경찰에게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를 요구해 틀어놨다고 한다. 낮 12시 넘어 개시된 경찰 작전에 의해 한 명은 검거됐고, 유리 조각을 목에 찌르며 자해하던 그는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응급실에 실려 온 것이었다.

나는 일반외과 레지던트와 함께 지강헌 앞에 섰다. 처음에는 약간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의식을 5단계로 나누는데 그중 2번째 단계, 그러니까 의식이 있지만 아주 명료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의사소통도 약간 됐던 거 같다. 목에는 심각하지 않은 자상이 관찰됐다.

몸의 상처는 그가 어떻게 총을 맞았는지 보여주었다. 경찰이 쏜 총 한 발이 그의 왼쪽 무릎 바로 아래로 들어가 무릎 위로 관통하여 나왔다. 그리고 복부에도 총상이 있었다. 방향으로 보아 아마도 무릎을 관통하여 나온 같은 총알이 다시 복부에 들어가 박힌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두 발의 각기 다른 총상일 수도 있었다. 환자는 응급실에 도착 당시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다. 원래 복부 외상은 일반외과 진료 분야이고 흉부외과의 진료분야는 흉부 외상이지만, 워낙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응급환자가 총상으로 내원했기 때문에 여러 외과계열의 의사들이 모두 응급실에 호출됐다. 특히 흉부외과 의사들은 쇼크 처치에 능했기 때문에 나는 외과 레지던트와 함께 그를 진료하게 되었다.

혈압은 출혈성 쇼크로 떨어져 있었다. 과다출혈로 말초혈관은 이미 수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초혈관에는 바늘을 꽂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 중심정맥이라고 부르는 큰 혈관에 주사를 삽입하는데, 지강헌에게도 쇄골하 정맥에 중심정맥 카테터(삽입관)를 꽂고 혈액과 수액을 공급했다. 혈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복부 총상을 입은 환자이기에 나는 환자 진료를 일반외과에 맡기고 당직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응급실에서 흉부외과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응급실에 내려가니, 그사이 환자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응급실 도착 당시보다 배가 더 부풀어 있었고 음낭과 옆구리가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아마도 후복막(내장기관을 둘러싼 얇은 막의 뒷부분으로, 척수 및 동·정맥 주변이 포함됨) 구역에 있는 대정맥·대동맥 등 큰 혈관이 다쳤을 가능성(후복막 출혈)이 있었고, 간이나 장간막 동맥의 손상에 의한 복강내 출혈의 가능성도 의심됐다. 당시 1년차 레지던트인 나의 짧은 소견으로 수술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고 일반외과에서는 계속 혈액을 주입하면서 상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반외과 레지던트가 난색을 표하며 내게 말하길 "이 환자는 아무래도 흉부외과에서 봐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배에 총을 맞은 환자를 가슴을 진료하는 흉부외과에서 진료하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나는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우리 일반외과 교수님께서 이 환자는 출혈이 문제인데 모든 출혈은 혈관이 다쳐 생기는 것이니 혈관을 전문으로 하는 흉부외과 의사들에게 환자를 넘기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는 난감해했다. 그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지시를 따라야 하는 저연차(1~2년차) 레지던트였다. 나 또한 힘없는 저연차였기 때문에 이 상황을 윗연차에게 보고했다.

'후복막 출혈'로 보이는 그 옆엔
힘없는 전공의 한명만이 있었다
"너도 철수하라"고 했지만
나마저 떠날 수는 없었다
탈주범은 쓸쓸히 내 품에서 죽었다
가슴을 찔려 피가 솟던 여자
초를 다퉜지만 수술은 거부됐다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였다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그 교수님을 흘겨볼 뿐
다른 도리 없이 지켜봐야 했다


칼에 찔릴 때 좌우편 심장의 차이

잠시 후, 응급실에 내려와서 환자 상태를 확인한 흉부외과 윗연차 레지던트는 다시 위에 보고하고는 내게 환자를 일반외과에 맡기고 빠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올라갔다.

그렇게 일반외과와 흉부외과의 힘없는 전공의 두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환자를 지켰다. 잠시 후 일반외과 소속의 윗연차 레지던트가 응급실에 와서는 나와 함께 있던 저연차 일반외과 레지던트에게 "왜 아직 남아 있느냐. 외과 교수님도 퇴근하셨다"며 환자를 흉부외과에 넘기고 철수할 것을 또다시 지시했다. 얼마 뒤 일반외과 전공의는 슬며시 사라졌다.

이제 그의 생명은 나의 몫이 되었다. 나는 다시 윗연차 레지던트에게 보고했다. 그는 응급실에 내려와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올라갔다. 잠시 후 응급실에 다시 내려온 그는 "복부 외상환자를 왜 흉부외과에서 진료하느냐. 일반외과에 넘기고 너도 철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떠날 수 없었다. 이미 철수한 일반외과 의사들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뒤 흉부외과 교수님도 퇴근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무기력한 전공의였던 나는 환자 곁을 지키며 혈액을 공급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카메라는 철수하고, 응급실엔 고요가 찾아왔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쓸쓸하게 내 품에서 운명했다.

그렇다면 원래 살 수 있었던 환자가 죽은 걸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수술을 해도 사망했을 가능성은 높았다. 그리고 당시 일반외과 의사들의 주장대로 후복막 출혈이 의심되므로 자연 지혈을 기대하는 것도 원칙일 수도 있었다. 후복막 출혈은 때에 따라서 수술하지 않고 상황을 좀더 지켜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환자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등의 둔상에 의해 후복막 출혈이 발생하는 경우 정맥이나 작은 혈관이 다쳤다면 피가 나오다가도 복막의 압력으로 출혈이 멎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를 기대하며 환자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기다리기도 한다. 수술을 하기 위해 개복하면 출혈이 더 심해지면서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상으로 인해 출혈성 쇼크에 빠졌던 지강헌의 경우, 지속되는 출혈 양상과 쇼크가 진행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응급수술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치료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끝내 그는 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와 무관하게 의사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지켜보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경우는 또 있었다. 2년차 전공의 시절, 한 병원에 파견 나가 있을 때였다. 응급실로부터 급한 호출을 받고 뛰어 내려가 보니 젊고 아리따운 여자 환자가 가슴을 칼에 찔려 실려와 있었다. 찔린 부위는 흉골의 바로 오른쪽, 심장이었다. 심장에는 4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좌심실은 압력도 높고 머리와 전신에 피를 공급하는 곳이라 칼에 찔리면 대부분 즉사한다. 반면 우심방과 우심실은 압력이 낮아 칼에 찔려도 즉사할 만큼 과다출혈이 즉시 발생하지는 않는다. 물론 환자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심방을 찔린 환자는 응급실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심정지가 일어나 심폐소생술을 했다. 심박동은 다행히 곧 돌아왔으나,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는 멈출 길이 없었다. 거즈로 막고 눌러 보았지만, 검붉은 피가 금세 배어나왔다. 그야말로 초를 다투는 상황이었다. 방법은 응급수술 말고는 없었다. 즉시 가슴을 열고 출혈 부위를 봉합하는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의사 있냐" 물어봐도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

마침 병원에는 당직중인 교수님이 계셨다. 연락을 받고 바로 응급실로 내려오신 교수님은 보호자를 찾으셨다. 그러나 보호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칼에 찔린 여성 환자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호프집에서 회식을 하고 있었는데, 호프집을 찾아온 남자가 난동을 부리다가 난데없이 손님으로 찾아온 회사원을 찌른 것이었다.

심장을 칼에 찔려 울컥울컥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상황에서 "보호자가 없으니 수술을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교수님을 바라보는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당시 나의 속마음으로는 그 교수님의 턱을 한 대 치고 환자를 수술실로 바로 옮기고 싶었다. 그러나 2년차 전공의였던 나는 결국 숨진 젊은 회사원의 주검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 외에,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수술을 거부한 교수님을 흘겨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카메라가 대부분 철수한 응급실에서 쓸쓸히 죽어간 지강헌의 경우, 의사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일반외과 의사가 흉부외과 의사의 도움을 받거나 혹은 단독으로 응급수술을 감행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심장을 칼에 찔려 안타깝게 숨진 회사원의 경우도 결과와 무관하게 즉시 응급수술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 대다수 의사들은 이런 상황에서 뒤를 생각하지 않고 수술을 감행한다. 그런데 무엇이 의사의 최선의 진료를 막았을까. 수술을 기피했던 그 교수님은 아마도 용감하게 수술을 진행했다가 혹독하게 대가를 치른 가슴 아픈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최선의 진료는 외과의사의 용기를 요구한다. 대다수 외과의사들이 용기를 내어 수술을 감행하지만 사실 모든 외과의사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과의사는 자신의 행위가 보호받을 수 있을 때 용기를 발휘한다. 뒷일을 걱정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돼야 하는 것이다. 만일 최선을 다하고서도 비난받거나 법률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면 의사들은 좀처럼 용기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비행기에서 응급환자가 생겨 주변을 향해 '의사 있느냐'고 물어보면, 요즘 많은 의사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일어나지 않는다. 선의를 가지고 나서서 진료를 해도, 그 행위에 대해 나중에 법적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항공사에서 의사 신분을 확인하는 것은 선물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법적 책임을 물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모든 의사는 환자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덤까지라도 따라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의사가 그런 용기를 가지려면 의사의 판단이 존중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끝으로 지강헌씨의 명복을 다시 빕니다. 25년 전 일의 기억을 더듬어 쓴 것이므로 세부적인 부분은 실제 상황과 일부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는 많은 외과의사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정리 남종영 기자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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